〈81〉공안이나 따지다 어느 때 쉴 수 있으랴

22. 종각선인(宗覺禪人)에게 주는 글

대우스님은 왜 임제스님에게

‘자네 스승은 황벽’이라 했겠나

본문: 덕산스님은 (용담스님이) 지촉(紙燭)을 불어 끄는 순간 경론의 소초(疎)를 모두 태워버렸다.

해설: 당나라 때 사천성 검남(劍南) 출신 덕산선감(782~865)스님이 용담숭신 선사를 찾아가서 말했다. “용담(龍潭)의 소문을 들은 지 오래인데, 와서 보니 용도 보이지 않고 못도 없구나.” 이에 용담선사는 “그대는 이미 용담에 왔네”라고 말했다. 그날 저녁 두 사람은 밤늦도록 대화를 나눴다. 이윽고 시간이 오래되어 덕산이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주위가 너무 어두워 불을 비춰달라고 청했다. 덕산이 불을 받아들고 신을 신으려고 하는 순간, 용담스님은 틈을 주지 않고 훅 불어 꺼버렸다.

이에 덕산이 크게 깨닫고 말하기를, “지금부터는 천하 노화상들의 혀끝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이튿날에는 짊어지고 다니던 <금강경> 소초를 모두 태워버렸다. 덕산이 떠난 후에 용담이 대중에게 말했다. “어떤 한 사람이 있어 어금니는 ‘칼숲(劍樹)’ 같고, 입은 ‘핏사발(血盆)’ 같다. 한 방망이를 때려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으니, 훗날 외로운 봉우리에서 나의 도를 세우리라.”

본문: 임제스님은 육십 방망이로 맞은 뒤에 돌연 내던졌으니, 모두가 투철히 벗어난 사람들이다.

해설: 임제스님은 황벽스님에게 ‘불법의 대의’에 대해 세 번 물었는데, 그때마다 20방씩 얻어맞았다. 임제스님이 깨닫지 못하고 하직인사를 하니, 황벽스님은 고안 땅에서 법을 펴고 있는 대우스님에게 가라고 지시했다. 임제스님은 대우스님을 찾아가서 “저는 세 번이나 불법의 대의에 대해서 질문했다가 전후해서 60통방을 맞았습니다. 도대체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대우스님은 “황벽스님이 그렇게 친절하게 너를 위해 지도해주었는데, 이제 와서 잘못이 있느니 없느니 묻느냐!” 하고 경책해주었다. 임제스님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깨닫고 “원래 황벽스님의 불법이 별 것 없구나!(元來黃檗佛法無多子)”라고 말했다. 이에 대우스님은 “자네의 스승은 황벽스님”이라며 돌려보냈다.

본문: 그런데도 이들은 일찍이 몇 차례나 조사의 방에 들어갔으며 법문을 몇 차례나 청했는지를 알지 못한다. 요즈음 도를 배우는 납자들은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대개는 그저 공안(公案)이나 기억하고 예와 지금을 비교하여 따지고 말을 외워 복잡한 이론을 풀고 표방하는 주장을 배운다. 그러니 어느 때에 쉴 수 있으랴.

해설: 덕산스님이 용담선사의 촛불을 훅 불어 끄는 기연에 몰록 계합하고 세간의 속박과 집착으로부터 초연히 벗어났지만, 잠시 위산영우 선사를 만나 뵙고 돌아와서는 예원의 용담선사 회상에서 30년간이나 시봉하면서 날마다 묻고 배우기를 더욱 정밀하게 하여 다시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다.

임제스님도 황벽스님의 방망이와 대우스님의 경책에 힘입어 생사일대사를 해결한 뒤, 황벽선사 곁에서 오래 모시면서 공부를 순숙시키고 스승의 법 쓰는 법을 배웠다. 그 자세한 기록은 <임제록>에 그대로 남아 전해오는데, 그 중에는 임제가 졸고 있는 것을 보고 황벽이 인정하는 대목이 재미있다. 여기에서 원오극근 선사는 ‘공안’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공안이란 원래 국가의 법령을 뜻하는 ‘관청의 문서(公俯案牘)’에서 유래한 말로서, 지켜야 할 절대적 규범을 말한다. 선불교에서는 ‘불조가 드러낸 불법의 도리’를 지칭하는 용어로 차용했다. 공안을 또한 고칙(古則)이라고도 한다.

공안의 형성은 당대(唐代, 618~907)의 선문답에서 시작하여 송대(宋代, 960~1279)에 와서 확립됐는데, 이 편지글을 쓴 원오극근(1063~1125)을 중심으로 스승인 오조법연(1024~1104)과 제자인 대혜종고(1089~1163) 3대에 걸쳐 공안에서 비롯된 의심인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 수행법이 정립됐다. 흔히 사용하는 ‘1700 공안’이란 말은 선사들의 깨달은 기연과 법어를 기록한 <전등록>에 수록된 숫자가 1701명인 점에서 유래됐다.


수불스님 | 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불교신문 2015년 11월 26일]